111년 만의 파격, 깃발을 내려놓은 13번째 그리핀
스텔란티스 그룹 산하의 영국 완성차 브랜드 복스홀이 미래 전동화 시대를 겨냥해 조형을 대폭 정제한 신규 그리핀(Griffin) 엠블럼을 공식 발표했다. 이번 개편은 1915년 사내 공모전을 통해 신화 속 동물인 그리핀 문장이 처음 도입된 이래 13번째로 단행된 공식 변경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111년 동안 그리핀의 손에 들려 있던 알파벳 'V' 형상의 깃발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다.
복스홀은 지난 2020년 선보였던 플랫 디자인을 바탕으로 곡선 요소를 걷어내고 각진(angular) 직선 위주의 실루엣으로 형태를 가다듬었다. 그리핀의 목덜미 털 묘사는 대폭 간소화되었으며, 입을 벌리고 있던 부리는 단단히 다문 형태로 바뀌었다. 전설 속 맹수의 위용을 나타내던 복잡한 장식 요소를 덜어내고, 기하학적 뼈대만 남김으로써 현대적인 시각 정체성을 구축한 셈이다.
복스홀 디자인 부문 총괄인 마크 아담스 부사장은 복스홀 모델이 영국 전역의 도로에서 즉각적으로 식별되는 만큼 고유의 핵심 자산을 유지하되, 차세대 전동화 차량에 어울리도록 조형을 간결하게 정돈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상징은 더 날카롭고 명확해져 복스홀의 디자인 철학인 '대담하고 순수한(Bold and Pure)' 기조에 부합한다는 설명이다.
디지털 디스플레이와 백라이트 조명을 고려한 기능적 삭감
복스홀의 이번 로고 간소화는 단순한 유행 추종을 넘어 전동화 차체 구조와 조명 기술의 물리적 요구가 반영된 조치로 풀이된다. 최근 완성차 업계는 내연기관 시절의 크롬 도금 입체 배지에서 벗어나 전면 패널 자체에 LED 조명을 투과시키는 일루미네이션 엠블럼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복스홀 역시 2021년 도입한 전면 일체형 '바이저(Vizor)' 패널과 2023년 '익스페리멘털 콘셉트'를 거치며 빛을 발하는 조명 엠블럼을 핵심 시각 언어로 발전시켜 왔다.
기존 문장처럼 깃발과 갈기 털, 벌어진 부리 등 얇고 촘촘한 세부 묘사가 집중된 형태는 야간에 백라이트를 점등했을 때 빛이 번지며 형상이 뭉개지는 한계가 있었다. 빛의 확산 효과 속에서도 멀리서 즉각적인 윤곽을 유지하려면 면과 선을 굵고 단순하게 재구성해야만 한다. 복스홀이 상징적 요소인 깃발마저 과감하게 삭제한 배경에는 암전 상태나 고속 주행 환경에서도 빛의 실루엣만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뚜렷하게 전달하려는 기능적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700년 영지 역사에서 출발한 헤리티지의 현대적 재해석
복스홀의 상징인 그리핀은 700여 년 전의 역사적 뿌리와 맞닿아 있다. 13세기 영국의 존 왕을 섬겼던 노르만 기사 포크스 드 브로테(Sir Falkes de Bréauté) 가문의 문장에서 유래한 그리핀은 그가 소유했던 런던 남부 영지 '포크스 홀(Fulk’s Hall)'의 이름이 점차 '복스홀'로 변천되면서 지명과 결합했다. 이후 1857년 증기기관과 펌프를 만들던 복스홀 아이언웍스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1903년 자동차 제조를 시작한 뒤 1915년 견습생 해리 발리(Harry Varley)가 공모전에 깃발 든 그리핀을 제안하면서 공식 배지로 정착했다.
복스홀 자체 소비자 조사에 따르면 영국 운전자의 65%는 차량 구매 시 즉각 알아볼 수 있는 브랜드 로고를 중요하게 평가하며, 59%는 오랜 기간 일관된 형태를 유지하는 로고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답했다. 120년이 넘는 자동차 제조 역사 속에서 축적된 상징적 자산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현대적으로 다듬은 것은 이러한 소비자의 보수적인 브랜드 인식을 고려한 전략적 행보로 볼 수 있다.
STX 콘셉트카로 공개… 2027년 양산차와 딜러망 전면 확대
새로운 그리핀 엠블럼은 2026년 10월 12일 개막하는 파리 모터쇼(Paris Motor Show)에서 대중에게 실물로 처음 공개된다. 복스홀은 왜건 형태의 전기 콘셉트카인 'STX 콘셉트(Sports Tourer eXperimental)' 전면 패널에 신규 발광 로고를 장착해 공개할 예정이다. 미래 전동화 라인업의 디자인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 쇼카를 통해 축소된 그리핀 실루엣이 실제 차체와 바이저 그릴 위에서 어떻게 발광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도로 위 양산 모델에는 2027년 출시되는 차세대 신차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다만 해당 로고를 최초로 탑재할 양산차가 차세대 아스트라(Astra) 전기 왜건이 될지, 혹은 완전히 새로운 순수 전기 크로스오버가 될지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복스홀은 차량 외장뿐 아니라 영국 내 딜러 쇼룸과 공식 서비스 센터, 디지털 채널 등 리테일 기업 이미지(CI) 전반에 걸쳐 신규 브랜딩을 순차적으로 교체할 계획이다.
자산 축소와 정체성 유지 사이, 글로벌 완성차 리브랜딩의 실무적 과제
벤틀리가 100여 년 만에 윙 엠블럼을 대대적으로 손보고 유수의 완성차 기업들이 앞다투어 로고를 2D 플랫 그래픽으로 개편하는 흐름은 디지털 UI 화면과 전면 발광 기술이라는 실무적 제약과 맞물려 있다. 복스홀의 이번 시도 역시 복잡성을 제거해 스크린과 차체 조명 양쪽 모두에서 직관적인 시인성을 확보하려는 전형적인 현대화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유서 깊은 고유 상징인 'V' 깃발을 덜어낸 점은 양날의 검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깃발은 오펠(Opel)과의 플랫폼 공유 속에서도 영국 독자 브랜드로서의 복스홀 정체성을 상징하는 알파벳 'V'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던 핵심 장치였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단순화가 디지털 시대의 시각적 명료성을 확보해 주는 반면, 역사적 장식성이 거세되면서 브랜드 고유의 서사가 희석될 위험이 상존한다. 실무 디자인 팀은 향후 딜러 네트워크와 양산차 조명 연출에서 새 실루엣이 오펠의 번개 로고나 다른 자매 브랜드와 충분히 차별화된 독자적 감성을 발현할 수 있도록 세심한 연출 전략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출처
Dezeen의 원출처와 본문에 표시한 참고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어로 재구성했습니다. ‘ARCH.B 분석’은 자료를 읽고 덧붙인 편집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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